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로 환원하려 했던 데 반해, 크립키는 고유명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적 장치임을 논증했다. 이 관점은 ‘필연/우연’과 ‘선험/후험’의 전통 결합을 해체하여, “물은 H₂O”처럼 후험적 필연이 성립하고, 일부 좌표(예컨대 특정 좌표의 표지판)가 선험적 우연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름의 지시는 의미 분석이나 내적 표상에서 나오지 않고 최초의 명명 행위와 사회적 전승이 만든 인과적 사슬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가능세계 의미론은 이러한 지시를 정밀하게 다루는 계산틀을 제공하여, 문장의 진릿값을 ‘어떤 가능한 상황들에서 참이 되는가’라는 집합으로 해석하고, 필연성과 가능성의 추론을 명료화한다. 본 글은 고정지시자·자연종 본질·인과적 명명·신념 퍼즐·양상 논리의 기초를 연표와 사례 중심으로 해설하고, 법적 고유명/상품 식별자/데이터 스키마/정책 규정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식별·라벨·본질·절차의 네 갈래 운영 지침을 제시한다. 목표는 난해한 논리를 현장의 설계 언어로 번역하여, 이름을 기술구로 잘못 다루면서 생기는 분쟁과 오류를 줄이고, 규정의 ‘필연/우연’ 구획을 선명히 하여 의사결정의 품질을 높이는 데 있다.
‘이름은 기술이 아니다’—인과적 명명, 고정지시, 그리고 후험적 필연의 재발견
고유명은 오랫동안 기술의 덩어리로 여겨졌다.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의 의미는 ‘플라톤의 제자, 리케이온의 설립자, 형이상학의 저자…’ 같은 충분한 기술들의 교차점일 것이라는 상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 상식은 두 가지 곤란을 낳는다. 첫째, 기술이 틀릴 때 이름이 지시를 잃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게델/슈미트 사례처럼 역사적 오인에도 불구하고 ‘게델’이라는 이름을 여전히 그 사람에게 돌려준다. 둘째, 동일한 기술을 충족하는 상이한 대상(혹은 가능세계에서 기술만 같은 다른 대상)을 이름 하나로 고정할 수 없다. 크립키가 고정지시자 개념으로 겨냥한 바로 그 지점이다. 그는 고유명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이름은 ‘그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붙잡는 장치이고, 기술은 대상을 찾아가는 실마리일 뿐 대상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이 인과적 명명 이론이다. 누군가(혹은 공동체)가 특정 대상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N’이라 부르자”라고 ‘세례(baptism)’를 하면, 그 이후 공동체의 전승과 의사소통의 고리가 그 이름의 지시를 인과적 사슬로 이어 간다. 나는 내부적으로 “N은 플라톤의 제자”라고 믿다가 그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되어도, 나의 이름 사용은 여전히 최초의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의미는 머릿속 정의의 무게중심에서 사회적·역사적 전승의 무게중심으로 이동한다. 이 전환 덕분에 우리는 유명한 분리—‘필연/우연’과 ‘선험/후험’—을 재구성할 수 있다. 전통적 상식은 필연적 진리는 선험적으로, 우연적 진리는 후험적으로 알려진다고 보았다. 크립키는 이 짝짓기를 해체한다. “물은 H₂O”는 필연적이다. 어느 가능세계에서든 물이라는 자연종이 있다면 그 본질은 H₂O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경험(후험)을 통해서만 안다. 반대로 “내가 여기의 ‘표준미터’ 막대다” 같은 문장은 특정 맥락에서 선험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 사실은 우연적이다. 또한 그는 자연종 필연주의를 통해, ‘호랑이=Felis tigris’처럼 자연종의 본질 규정이 가능세계에 걸쳐 고정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모든 논의는 가능세계 의미론이라는 정확한 장치로 정리된다.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세계들의 집합(정확히는 가능세계→진릿값 함수)으로 표현되고, ‘필연’은 모든 세계에서 참, ‘가능’은 적어도 한 세계에서 참으로 전환된다. 이름이 고정지시자라면, ‘N=F’ 유형의 항등 명제는 참일 때 필연적 참이 된다. 여기서 생기는 고전 난제가 신념 보고의 퍼즐이다. “로이스는 슈퍼맨은 날 수 있다고 믿지만, 클라크 켄트는 날 수 없다고 믿는다.” 슈퍼맨=클라크 켄트가 필연 항등이라면 모순 아닌가? 크립키의 해법은 지시의 층위를 구분하는 데 있다. 신념 보고는 ‘표현 양식’(구문적 표지)에 민감한 태도 보고이며, 고정지시적 항등은 지시적 층위의 진리다. 그러므로 동등성이 보존되지 않는 태도 맥락에서 항등을 무턱대고 치환하면 오류가 난다. 이처럼 고정지시자는 단순한 명명 기술이 아니라, 진리·인지·태도의 서로 다른 층위를 분리하는 도구다. 요컨대 이름은 기술이 아니며, 의미는 사회적 사슬로 유지되며, 필연은 경험을 통해 발견되기도 한다—이 세 문장이 크립키의 기획을 압축한다. 남은 과제는 이 통찰을 어떻게 현장의 문서·규정·데이터 설계로 옮길 것인가이다. 우리는 다음 절에서 ‘식별자/라벨/본질/절차’ 네 축의 운영 지침으로 변환해 볼 것이다.
식별·라벨·본질·절차—고정지시자 철학을 법·데이터·제품·정책 설계로 번역하기
첫째, 식별(Identifier). 고정지시자의 교훈은 실무에서 곧 불변 키의 설계다. 사람·조직·자산·문서에 부여되는 주 식별자는 표시명과 분리된 영속적 키(UUID, 해시, 행정식별 등)여야 하며, 병합·분할·개명·브랜드 변경에도 유지된다. 고유명(상호·인명·장소명)을 제목/표시로 쓰되, 판단·계약·데이터 결합은 반드시 영속 키로 수행한다. 고유명을 기술구로 다루면(“본사 소재지가 X인, 2010년에 설립된…”) 작은 사실 변동에도 지시가 흔들려 분쟁이 생긴다. 둘째, 라벨(Labeling). 크립키의 ‘후험적 필연’은 규정 라벨링으로 구현된다. 규정·정책·스키마의 각 항목에 “필연/우연/범위·조건” 라벨을 부여하라. 예컨대 개인정보 항목 가운데 주민등록번호는 ‘필연적 식별자(본질)’로, 연락처·직함은 ‘우연적 속성(변동 가능)’으로, 마케팅 수신 동의는 ‘조건적 상태’로 표기한다. 보고서·약관·설계 문서가 이 라벨을 가질 때, 변경·동의 철회·마스킹·가명처리의 경로가 자동으로 결정된다. 셋째, 본질(Essence). 자연종·상품군·서비스 타입에 본질 규정서를 둔다. ‘물=H₂O’처럼 본질이 실험·검증·규격으로 고정되는 항목과, 상황적·관습적 특징이 많은 항목을 분리하라. 제품에서는 핵심 기능과 부가 기능을, 데이터 모델에서는 식별 키와 설명 속성을, 법에서는 당사자·목적·권리/의무의 본질 항목을 표로 나눈다. 이때 본질 규정은 언어적 정의가 아니라 시험 절차/규격 문서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넷째, 절차(Procedure). 이름은 사회적 사슬로 유지된다. 따라서 명명·변경·병합·폐기에는 인과적 사슬을 보존하는 절차가 필수다. (1) 최초 등록 시 세례 기록—근거 문서/증빙·시점·등록자·버전—를 남긴다. (2) 표시명 변경 시 동등성 매핑 테이블을 유지해 과거 데이터의 추적 가능성을 확보한다. (3) 중복/병합 시 ‘서명된 병합로그’를 생성해 두 식별자의 이력과 권리/의무의 연쇄를 잇는다. (4) 삭제는 지시의 파기를 뜻하므로, 계약·법·감사에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만, 대개는 비가시화(soft delete)로 처리한다. 다섯째, 신념·태도 데이터의 분리. 로이스 사례는 실무에서도 반복된다. 사용자 평가·설문·고객센터 로그에는 동일 대상을 서로 다른 ‘표현’으로 지칭한 문장이 섞여 있다. 이때 표현 양식(phrase)과 지시적 동일성(identity)을 구분하는 스키마(예: belief {phrase, referent_id, stance})를 채택하면, 태도 분석에서 항등 치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여섯째, 가능세계 시뮬레이션. 규정 변경·정책 실험·제품 롤아웃을 ‘가능세계’로 생각하고, 각 시나리오에서 규정이 참/거짓이 되는 조건을 표로 만든다. 예컨대 환불 규정에서 “배송완료 전 취소 가능”은 대부분의 세계에서 참이지만, “맞춤 제작 상품의 환불 가능”은 특정 세계(하자 인정/법령 예외)에만 참일 수 있다. 각 규정 항목에 ‘참이 되는 세계의 서술(조건 집합)’을 붙이면, 분쟁 조정과 자동화 판정의 일관성이 올라간다. 일곱째, 양상 추론의 표준화. 문서에 ‘반드시/가능하다/불가’ 같은 양상 표현이 등장할 때, 내부 위키에 양상 논리의 최소 규칙(필연⊃가능, 합의한 폐쇄 규칙, 예외 상속 규칙)을 명시해 규칙 충돌 감지를 자동화한다. 여덟째, 명명과 브랜드. 기업/상품의 리브랜딩은 이름의 바꿈이지 지시의 교체가 아니다. 크립키의 관점에서 리브랜딩 절차는 “표시명 치환 + 인과 사슬 보존”이다. 즉, 과거 계약·보증·리뷰의 지시 대상은 그대로 여야 하며, 레거시 명칭을 동등성 매핑으로 계속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아홉째, 법적 고유명의 보호. 부동산 등기·법인 등기·특허/상표에서의 명칭은 사회적 사슬의 허브다. 이름을 기술구로 과도하게 정의하면(예: “서울에 소재하고 연매출 X 이상의…”) 작은 변동에 권리관계가 흔들린다. 등기 키와 표시명을 분리하고, 본질 항목(권리주체, 대상, 범위)을 고정해 분쟁 비용을 줄인다. 마지막으로, 교육과 설명. 사용자를 ‘언어철학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다만 온보딩에서 “이름은 바뀌어도 이것(키)은 같습니다”, “이 항목은 필연, 이 항목은 우연” 같은 1분짜리 설명 카드만으로도 오류는 크게 줄어든다. 크립키의 철학은 이렇게 일상 운영의 위생으로 번역될 때 가장 강력하다. 이름을 기술로 착각하는 순간 생기는 모든 비용—중복, 추적 불능, 분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후험적 필연과 인과적 사슬—‘가능한 세계들’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이름의 설계
크립키가 남긴 핵심을 실무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세 가지다. 하나, 이름은 기술이 아니라 고정지시다. 지시는 최초 명명과 사회적 전승의 인과적 사슬로 유지된다. 그러므로 식별은 표시명과 분리된 영속 키로, 명명은 세례 기록과 동등성 매핑으로 관리해야 한다. 둘, 필연/우연과 선험/후험을 교차 배치하라. “물=H₂O”처럼 본질 규정은 가능세계 전역에서 필연일 수 있지만, 우리의 인식은 경험을 거쳐서만 성숙한다. 실무에서 이는 ‘본질 라벨’과 ‘절차 라벨’을 분리한다는 뜻이다. 무엇이 본질적으로 고정되는가(식별자·권리주체·핵심 기능), 무엇이 절차적으로만 고정되는가(동의·옵션·표시)는 문서의 다른 층에 위치해야 한다. 셋, 가능세계 표로 판정을 설계하라. 규정 문장을 “어떤 조건들의 집합에서 참인가”로 다시 써서, 자동화·심사·분쟁 조정의 일관성을 확보하라. 이 세 줄을 습관으로 만들면, 이름과 규정은 변동의 파도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실행 체크리스트를 제시한다. ①핵심 엔터티(고객·계약·상품)에 영속 키가 있는지 점검하고, 표시명과 키의 분리 원칙을 위키에 명문화한다. ②규정/스키마 항목에 ‘필연/우연/조건’ 라벨을 부여하고, 본질 규정서는 시험 절차와 함께 링크한다. ③명명·병합·분할·삭제의 절차와 로그를 표준화한다. ④신념·태도 데이터를 수집할 때 표현과 지시를 분리해 스키마를 설계한다. ⑤주요 규정 10개를 선택해 가능세계 표(조건→판정)를 작성하고, 예외 상속 규칙을 테스트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인다. 후험적 필연의 어휘는 우리에게 겸허를 가르친다. 어떤 진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게 되지만, 알게 된 순간 그 진리는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설계와 법과 데이터의 세계에서도 동일하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운 규정과 식별의 원리를 문서와 절차에 새겨, 내일의 변동 속에서도 오늘의 동일성을 지킨다. 그때 비로소 이름은 제자리를 찾고, 규칙은 세계들 사이를 건너도 무너지지 않는다. 가능세계 의미론은 추상적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변동이 많은 시대에 동일성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기술이다.